검찰 총장의 우울

검찰 총장의 우울

검찰 총장의 우울

 


검찰총장 취임식을 하루 앞둔 밤. 내정자 고현동은 깊은 상념에 빠졌다. 때때로 ‘쯧쯧’하며 부상당한 설치류 같은 소리를 내기도 했다.


검사 집권 국가에서 법조인 중 정점에 오른 감개무량일까. 지나온 세월과 여정에 대한 회한일까. 20년 가까이 붙은 ‘무관의 제왕’이라는 오랜 별명과 이별을 앞둔 일종의 통한일까. 혹은 어느 법정 드라마에 나온 클리셰 신의 흉내일까.


서울대 캠퍼스 커플로, 3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해온 부인조차 그 우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도내 No.1 고현동’이라는 별명을 스스로 지어 손바닥에 적어 넣고 다닌 현동은, 어딘가 총명함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행동거지와는 다르게 거제도에서 알아주는 손꼽히는 영재였다고 한다.


아홉 살이 된 현동은 군부정권 출신 대통령이 스스로 헌법을 바꿔 3번 연속 집권하는 것을 보고 ‘권력은 세상의 전부’라는 가르침을 얻었다. 


초-중-고에 걸쳐 학생회장을 역임했던 이유 역시 그것이 미성년이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권력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영특하기 그지없던 현동은 열 살부터 법조인을 꿈꿨다. 자신의 물리적 능력을 동원하지 않고 타인의 힘을 동원해 누구든 벌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끌렸다고 한다. 


그는 학창 시절 ‘무패의 사나이’로 알려지기도 했다. 단 한 번도 물리적인 싸움을 발생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물리적 충돌의 낌새를 감지하면 상대를 불문하고 ‘미안해..’라며 거짓 사과를 하는 데 특히 능했다.


현동은 19세에 대입 학력고사를 위해 서울 신림동을 방문하기 전까지 통영 2회, 부산 1회를 다녀온 것이 도를 벗어나 본 경험의 전부였다. 


이는 기이한 사고로 와전되어 ‘거제도 1등이 곧 대한민국 1등’이라고 믿게 되었다. 왠지 동향의 거물 정치인 김영삼이 일간지 1면에 자주 오르는 것을 보며 자신의 신념을 더욱 강화시키기도 했다.


스스로 ‘대한민국 1등 고등학생’이라 믿는 현동의 자만은 몽돌처럼 굳어졌다. 


상투적 이야기의 흐름대로라면 자만하는 자들이 실패하는 내용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현동은 상투적인 사나이가 아니었다.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 것이다. 


1980년, 전두환 정부가 난데없이 서울대 법대 정원을 280명에서 360명으로 늘렸다. 현동은 과에서 358번째로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이러한 사실은 본인이 스스로 밝히기 전까지는 입학처에서만 알 수 있는 법이었다. 학기초, 으레 입학 성적 이야기가 동기들 사이에서 화두로 등장할 때면 현동은 “어, 나도 좀 했지. 하루에 10시간씩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아 별명이 ‘거제도 방파제’였어”라며 너스레를 떨며 묻어가곤 했다.


아홉 살 이래 단 하루도 ‘권력’이라는 단어를 가슴에서 지운 적 없는 현동은 대학교 학생회장을 꿈꿨으나 내비칠 수 없었다. 360명 중 359등으로 입학했다는 사실이 어느새 가슴 한 편에 자격지심으로 자리 잡고 말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왠지 이미 학교의 주류를 이루는 무리들이 생겨난 듯했다. 이들은 서울의 어느 남자 고등학교 출신들이라고 했다. 현동은 잘 알지 못했으나 학생들끼리는 출신 고등학교의 랭킹 리스트가 돌고 있었다. 현동의 모교는 그 안에 없었다. 거제중앙고였다.


이를 계기로 현동은 자신이 비주류라고 믿기 시작했다. 왠지 ‘비주류 정치인’이라는 단어가 ‘주류 정치인’ 보다 사연이 있어 보인다는 점이 특히 맘에 들었다.


군부정권이 이어지며 대학생들의 학생운동이 대중화되던 시대였다. 학생운동을 해야 주류에 편입될 수 있다고 믿은 현동은 기회를 엿봤다. ‘뱀의 머리냐, 용의 꼬리냐’의 선택이 아니라 처음부터 뱀의 꼬리가 되기로 했다. 


학생회 이외에도 캠퍼스 내 무수한 학생운동 조직들이 생겨났고, 대외적인 이름과 활동이 별개인 경우가 많았다. ‘서울대 아프리카어 강독 학회’, ‘SPC(서울대 폴로 클럽)’, ‘서울대 북동아 식물 채집 동호회’ 등이 그랬다.


현동은 학생운동 계 비주류 중 비주류라 불리는 ‘서울대 사물놀이 동호회’에 꽹과리 주자로 입단했다.


그러나 현동은 어려서부터 권력욕에 심취했을 뿐 도무지 사회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성적을 올리는 행위 이외에 그가 고향에서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 행위들은 멸치잡이 어장을 어슬렁거리며 멸치의 말려진 정도를 관찰하거나, 밀물 썰물 시간대에 해안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주류로 편입되기 위한 현동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당시 유행에 따라 구로공단에 있는 작은 공장에 취업하기도 했다. ‘내가 과외를 하면 여기 일당의 다섯 배를 받는데 이딴 걸 왜 해야 하지’하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뭇국과 김치, 멸치볶음과 보리밥을 내놓는 함바집 밥만은 도저히 참지 못했다. 점심시간에 배탈이 났다며 공장 노동자 무리를 빠져나와 홀로 불고기 백반을 시켜 먹고 오기도 했다.


그러나 현동의 의지와는 달리 노동 운동은 이틀 만에 끝나고 말았다. 공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에겐 일머리라는 게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육체노동에 있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


현동은 기지를 발휘했다. 학생운동 점조직인 서울대 사물놀이 동호회 학우들에게 ‘야학이 끝나고도 작업량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야간 노동을 하던 중 공장 기계에 부딪혀 어깨가 탈골됐다. 그 때문에 사장이 배려의 차원에서 퇴사시켰다’고 말했다.


붕대가 아니라 이불보 쪼가리 같은 천으로 왼쪽 어깨를 대충 묶어 고정한 게 티가 날 만도 했지만, 학생운동을 향한 현동의 진의를 의심하는 학우는 없었다. 서울대 사물놀이 동호회는 끈끈한 학생운동 조직이었다.


이 에피소드가 캠퍼스에 퍼지면서 현동은 어느새 주류로 편입되었다. 학생회의 비공식 멤버로 합류한 것이다. 어깨엔 이불보 천 대신 붕대가 감겨있었다. 


학생운동에서 현동의 강점은 매우 뻔한 얘기를 큰 목소리로 선창하는 것이었다. “새벽이 지나면 아침이 온다!”, “외침의 또 다른 이름은 혁명이다!”, “너와 나, 그것이 바로 우리다!”와 같은 구호를 선창하면 학생들이 엉겁결에 크게 따라 외쳤다. 


어느 날은 외칠 문장이 생각나지 않아 “무기여 잘 있거라!”라고 선창했는데 모두가 따라 외쳤다. 


1987년이 되자 민주화를 향한 대학생들의 열의는 더욱 거세졌다. 민주항쟁의 시위 현장들이 더욱 빈번하게 생겨났지만 그 자리에 현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장 낮은 사람이다. 너희들의 뒤를 받치며 희생해야 할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다”라며 현동이 붕대 맨 어깨를 들어 올려 이야기 할 때, 학우들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무려 3년 동안이나 같은 자리에 붕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 만도 했지만, 그런 시각은 민주화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듬해, 민주주의가 찾아오며 학생운동 시대도 접어들기 시작했다. 현동은 기다렸다는 듯 그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부상을 핑계로 시위 현장에 참가하지 않은 모든 시간을 사법시험공부에 투자해왔다. 


사법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한 이후 그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서울지검에 배정돼 범죄와의 전쟁에 투입됐고, 다단계 피라미드와 같은 굵직한 사건을 맡아 성과를 내며 더욱 승승장구했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자 그는 가슴속에 품어온 권력 욕구를 표출하고자 했다. 정치에 입문을 선언했고, 여당과 야당에서 모두 호출했지만 여당을 선택했다. 


‘여당이 더 세니까’라는 무지성에 가까운 결정이었으나, 언론은 그를 ‘운동권 출신 검사’, ‘포스트 노무현’ 등으로 포장했다. 사실 여당 당무자가 정치부 기자들에게 사주한 표현들이었다.


고현동은 그해 제16회 국회의원에 고향인 거제도에서 출마했으나 12%의 득표를 얻고 낙선했다. 거제도는 선거 이래 단 한 번도 진보당이 선출된 적 없는 지역이기에 당내에서도 말렸으나 “내 거제도 왕 아입니꺼‘와 같은 알 수 없는 소리로 자신감을 내비치다 패배했다.


2년 후, 현동은 돌변해 당적을 바꿨다. 검사 출신 총재가 있는 당이었다. ’진보당은 인기가 없는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검사 출신으로 고향과도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언론에 밝혔다.


학생운동을 함께했던 82학번 친구들에게 “너 미쳤냐”며 전화가 빗발쳤다. 현동은 “이것이 나의 민주화”라며 그럴듯한 문장인 듯 말했지만 친구들로부터 절연 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더 이상 23세가 아니라 이미 40세였다.


현동의 정치 감각은 상상을 초월하게 무가치한 것이었다. 그해 16대 대통령선거에선 진보당 출신 대통령이 됐다. 


현동이 속한 당에서는 “상고 출신이 대통령이 됐다”며 욕했다. 현동은 같은 생각이었지만 언젠가 ’포스트 노무현‘이라는 표현이 싫지만은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왠지 화가 났다. 진보당 시절에 고향에서 12%의 득표를 얻고 참패한 치욕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인기 있는 당인 줄 알고 옮겼는데 대선에 패배해 베팅을 잘못했다는 자책감 역시 커졌다.


‘진보 정치가 나의 정치인생을 방해한다’는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린 현동은 보수정치인의 길을 걷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이후 두 번의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이 지나도록 고현동은 ‘보수의 숨은 실력자’라고 스스로를 어필하는데 성공했다. 


공천 시기가 오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국회의원 불출마를 선언하며 스스로를 ‘낮은 사람’, ‘보수 보급 부대’라고 칭했다.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당내 정치인이 그를 두고 ‘국회의원 경력 0일’의 정치인‘, ‘보수계의 박지원’이라며 기자에게 말하는 걸 듣기도 했으나 애써 못 들은 척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 입문 22년 만에 고현동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헌정 최초로 검사 출신 대통령이 당선된 것이다. 새 정부의 검찰총장 후보로 그의 이름이 하마평에 올랐다. 


보수정치인으로 20년 동안이나 공천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지 않은 덕분에 고현동은 당내에서 ‘법조인 출신의 무결한 보수 정치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왠지 법조인 경력보다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이 더 길었지만. 원래 국가의 인사에 있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법이다.


장롱면허 소유자 국토교통부장관. 바다 마을 출신의 해수부 장관. 변호사 출신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의료인 출신의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에 비하면 현동은 꽤나 경력자로 치부 받고 있었다. 새 정부 주요 직책 후보의 70%는 법조인 출신이었다.


고현동 검찰총장 내정자의 취임식이 열렸다. 흰 바탕에 붉게 수놓인 한복을 입은 그의 부인이 취임식에 참석해 고현동의 옷매무새를 만져주기도 했다.


그때였다. 고현동은 지난밤 깊은 상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부인의 얼굴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부인의 얼굴이 대중들에게 공개된 첫 자리가 바로 검찰총장 취임식이라는 사실이 현동을 괴롭게 했다.


현동의 부인은 추녀였다. 외모지상주의적 시각이 구시대의 산물처럼 치부되는 시대에, 추녀라는 단어조차 지나치게 고전적이게 느껴짐에도. 어쩔 수 없다. 어떤 각도로 봐도 도무지 잘 생긴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부인의 어렸을 적 별명은 ‘빵떡이’, ‘참깨빵’ 등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장미희.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이름 때문에 놀림받자 더욱 공부에만 매진했다고 한다. 신사역 3번 출구에 위치한 ‘장미희 성형외과’의 대표원장을 20년째 맡고 있다. 


취임식 다음날, 10대 일간지에서는 일제히 검찰총장 취임식 사진을 일면 톱으로 냈다. 검찰총장 부인이 검찰 총장의 옷매무새를 매만지는 투샷이었다.


검찰 총장실 책상에 놓인 신문을 책상 한편으로 치우며 고현동은 신음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포털 사이트 검색 창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연관 검색어에 ‘고현동 부인’, ‘고현동 와이프’, ‘고현동 결혼 이유’와 같은 검색어가 노출됐다.


고현동은 대한민국의 검찰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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